통장 사본을 거래처에 보내야 할 때, 계약서를 참고용으로 넘겨야 할 때, 주민번호나 계좌번호는 지우고 보내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PDF 편집 프로그램에서 검은 사각형을 그려 그 위를 덮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가린 것이 아닙니다. 덮은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글자는 파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받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몇 초 안에 읽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PDF에는 글자와 그림이 따로 들어 있습니다
PDF는 그림 파일이 아닙니다. '이 위치에 이 글꼴로 이 글자를 그려라', '이 위치에 이 크기의 검은 사각형을 채워라' 같은 지시가 순서대로 담긴 문서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모습은 그 지시를 차례로 실행한 결과입니다.
검은 사각형을 나중에 얹으면, 문서에는 '글자를 그려라'는 지시와 '사각형을 채워라'는 지시가 둘 다 남습니다. 사각형이 나중에 실행되니 눈에는 글자가 안 보이지만, 글자를 그리라는 지시 자체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물감으로 덧칠한 것과 비슷합니다.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아래 글씨가 종이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PDF에서는 그 아래 글씨를 꺼내 보는 일이 물감을 벗기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어떻게 드러나는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아무 PDF 뷰어에서나 되고, 실수로 발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문단을 복사해 인용하려다 가려진 번호까지 함께 붙는 식입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공개한 문서에서 이런 방식으로 가려진 정보가 드러난 사례가 국내외에서 반복적으로 보도돼 왔습니다. 담당자가 부주의했다기보다, 덮는 것과 지우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 큽니다.
덮기만 한 문서에서 가린 내용을 읽는 방법
- 검은 사각형 위를 마우스로 긁어 복사한 뒤 다른 곳에 붙여 넣습니다. 글자가 그대로 나옵니다.
- 문서 내 검색으로 숫자 일부를 찾습니다. 검색이 되면 글자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 PDF를 텍스트로 저장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변환합니다. 사각형은 사라지고 글자만 남습니다.
- 사각형 개체를 선택해 지웁니다. 편집 프로그램에서 한 번 누르면 됩니다.
제대로 지우려면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글자를 그리라는 지시 자체를 문서에서 찾아 삭제하는 것입니다. 전문 편집 도구의 '검토·삭제(redaction)' 기능이 이 일을 합니다. 문서 구조를 다루는 작업이라 도구가 제대로 만들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페이지를 그림으로 다시 그린 뒤 그 그림 위에 칠하는 것입니다. 페이지를 사진 찍듯 새로 만들면 글자 지시는 남지 않고 픽셀만 남습니다. 그 픽셀 중 가릴 부분을 검게 덮으면, 덮인 자리에는 애초에 정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확실합니다. 복사할 글자가 아예 없으니 꺼낼 것도 없습니다. 브라우저에서 처리하는 도구들은 대개 이 방식을 씁니다.
가린 뒤 만들어진 파일을 열어 그 부분을 긁어 복사해 보세요. 아무것도 복사되지 않으면 제대로 지워진 것입니다.
대신 잃는 것
페이지를 그림으로 바꾸면 문서 전체에서 글자 검색과 복사가 안 됩니다. 가린 부분만이 아니라 문서 전부가 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장짜리 계약서를 이 방식으로 처리하면, 나중에 특정 조항을 찾을 때 눈으로 넘겨야 합니다.
제출용으로 한 번 보내는 문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계속 참조할 문서라면 원본을 따로 보관하고 가린 사본을 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검색이 꼭 필요하면 가린 뒤에 글자 인식(OCR)을 한 번 더 돌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글자를 읽어 검색 가능한 층을 새로 얹는 것인데, 이때 읽히는 것은 남아 있는 글자뿐입니다. 검게 칠한 자리에는 읽을 것이 없으니 그대로 비어 있습니다.
스캔본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복합기로 스캔한 문서는 이미 그림입니다. 글자 지시가 애초에 없으니, 검은 사각형을 얹는 것만으로도 아래에서 글자를 꺼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사각형이 별개의 개체로 얹혀 있다면 그것만 지우고 아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자체를 수정한 것이 아니라 위에 도형을 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스캔본에 글자 인식을 한 번 돌려 둔 상태라면 눈에 안 보이는 글자층이 이미 들어 있어서 복사가 됩니다.
그래서 스캔본이라도 그림을 새로 만드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스캔본은 글자 정보가 없어 자동으로 찾아 주는 기능이 통하지 않으니, 가릴 자리를 직접 지정해야 합니다.
보내기 전 확인할 것
- 1가린 자리를 마우스로 긁어 복사해 봅니다. 아무것도 안 나와야 합니다.
- 2문서 검색으로 주민번호 앞 여섯 자리처럼 일부를 찾아 봅니다. 검색되면 안 됩니다.
- 3가린 것 말고 놓친 것이 없는지 훑습니다. 계좌번호,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서명 이미지, 그리고 문서 속성에 남은 작성자 이름까지요.
- 4여러 장짜리라면 마지막 장까지 봅니다. 첫 장만 처리하고 보내는 실수가 잦습니다.